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불행했다.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자연은 보석을 찾아야 했다.

무엇이 보석인지 알지 못했기에, 수없이 다양한 돌들을 양산하는 방법을 택했다.

수없이 다양한 생물 개체들. 도태라는 가혹한 방법으로 

그들은 마치 시간을 중력삼아 우리를 자연선택이라는 체에 걸렀다. 

 

당시엔 풍요 속의 행복이란 건 존재하기 어려웠다. 매우 귀중한 것이었고, 소수만이 누릴 수 있었다. 

행복은 칠흑 속에 틈틈이 박힌 밤 하늘 별빛과 같이, 가끔씩 찾아오곤 했다. 잔혹하고 또 잔혹한 생존의 일상 속에 조금씩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식, 혁명을 일으킨다. 

정착을 했고, 농사를 지었고, 기계화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정보화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며, 이제 또 하나의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다. 

기계화 산업혁명은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활자 인쇄물의 등장으로 인해 정신적인 컨텐츠에 대한 복제 능력을 주었고, 정보화 혁명은 또다른 정신적(수많은 텍스트, 영상, 게임, 지역에 무관한 사람간의 소통 등) 컨텐츠에 대한 복제 능력을 주었다. 

 

복제 능력이라 함은, 앞서 말한 자연의 개성적 진화 방식과 대조된다. 자연 속에선 복제라는 게 상당히 어렵다. 

자연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극히 일부의 영역에서만 복제가 일어난다.

또한 복제보다 개성이 먼저 등장해야 복제도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개성적인 진화 끝에 나타난 자연 위의 조금 더 복잡한 구조물, 인간의 뇌와 그 피조물들에 의해

 

복제가 용이한 (사이버)세계가 등장했고, 

 

엣날이라면 쟁취하기 위해 경쟁했어야 했고

 

대부분이 얻지 못한 채 상실 속에서, 물질, 정신적 가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지만, 이제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수많은 컨텐츠가 값싸게 누구에게든 공급될 수 있는 시대고 

자연 속에서, 우연 속에서 강, 약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옛날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여전히 경쟁은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 그 경쟁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너무나도 샐 길이 많다. 너무나도 누릴 것이 많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다만 아직 여전히. 이성이라는 문제는, 자연의 분포를 따르므로-이를테면 대부분의 이상형은 매우 적은 분포 하에 있다- 커다란 경쟁 속에 놓여있다. 

이성은 아직 (일부 필요한 요소들만조차도) 복제가 안 되기 때문에, 옛 수요 경쟁 체제를 따르는 거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유난히 목메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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